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JJONY 2020. 2. 8. 16:39

: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작가 : 서메리

읽은 기간 : 20191127~ 1211

출판사 : 미래의 창


본문 中-

하지만 돌이켜 보면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것.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관찰했어야 했다. page. 19

 

회사에서 야근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상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윗선의 결재를 기다리고, 다른 팀의 자료를 기다리며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묶여 있는 시간은 11초가 고문 같았다. 그렇게 긴 야근을 마치고도 기다리던 무언가를 해결 하지 못한 채 집에 온 날이면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일단 퇴근을 하면 스위치를 끄듯 회사 일을 잊어버리고 마음 편히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책임이면서 남의 손에 달려 있는 그 일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page. 30

 

그리고 현재의 나는, 거짓말처럼 회사를 벗어나 그때 적었던 것들 중 여러 개를 직업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다. page. 42

 

나는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 가지고 있던 신용카드의 유효기간을 최대한 연장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은행을 찾아가 마이너스 통장의 한도도 최대로 늘렸다. 더럽고 치사하긴 해도, 회사가 보장하는 월급과 4대 보험을 잃는 순간 우리나라 금융권이 나를 헌신짝처럼 버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건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4대 보험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은행과 카드 회사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정말이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page. 63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입문반에서 기초 지식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내 주된 고민은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나면 어떡하지?’, ‘마감에 늦으면 어떡하지?’ 같은 기술적이고 절차적인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배움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생각 자체가 지극히 안이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업계를 막론하고 한 분야의 프로라면, 그것도 경력과 평판이 전부인 프리랜서라면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고 납기에 맞추지 못한다는 건 애당초 자격 미달이었던 것이다. page. 97

 

사실 나는 그동안 출판사와 에이전시의 눈에 조금이라도 뛸까 싶어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쳐 제출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요리나 핸드메이드 소품 만들기 같은 자잘한 취미부터 운영 중인 블로그까지 나를 알릴 수 있는 정보는 깨알같이 전부 기재했고, 어설프게 웹툰 연재에 참여하면서부터는 경력 란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라는 문구도 슬쩍 추가했다. 사소해 보여도 이 노력은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에이전시에서 요리와 일러스트에 익숙하다고 적힌 내 이력을 감안하여 새로 들어온 일러스트 요리책의 번역가 후보로 나를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page. 139~140

 

 

왜 지금껏 누군가 책을 맡겨 주기만 기다리고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지? 출판사 등록을 하고 내가 번역한 책을 내 손으로 팔면 되잖아! page. 177

 

설립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막상 체험해 보니 1인 출판사를 세우는 과정은 김이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마음에 드는 출판사 이름을 정한 뒤 주민등록증 하나 들고 구청과 세무서에 방문하여 신고를 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page. 178

 

나는 번역을 포함한 글과 그림을 주업으로 삼고 있지만, 어떤 분야에 속해 있든 프리랜서라면 누구나 영업, 수익창출, 지원, 배움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테트리스처럼 적절히 분배하여 일과 시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영업부서와 수익창출부서, 지원부서, 교육부서, 하다못해 부서는 아니더라도 그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이라도 꼭 필요하듯이, 네 가지 업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프리랜서의 밥벌이에는 당장 심각한 애로 사항이 생긴다. 정말이지, 모든 프리랜서가 1인 기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page. 204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업무 자체 때문에 퇴사를 생각할 정도로 괴로움을 느낀 기억은 별로 없다. 어쨌든 회사는 월급을 주는 곳이니, 맡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업무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 가려 노력하는 것 정도는 당연한 밥값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내 인간관계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page. 253~254